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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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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대는 삼국 시대 오나라의 장수로, 젊은 시절에는 지방 관리를 지내다 손권에게 발탁되어 여러 요직을 거쳤다. 회계군 반란 진압, 형주 분쟁, 교주 자사 임명 등 주요 사건에 참여하여 군사적, 행정적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교주 자사 재임 시 사휘의 반란을 진압하고 남방 지역을 평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만년에 대사마에 이르렀다. 96세의 고령으로 사망했으며,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로 칭송받았고, 친구 서원과의 우정은 미담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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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여대 (呂岱)
본관서주광릉군해릉현
자 (字)정공 (定公)
출생161년
사망256년 10월 21일 (향년 95세)
관직
직위대사마 (大司馬), 교주목 (交州牧), 번우후 (番禺侯)
군사 직위진남장군 (鎮南將軍), 안남장군 (安南將軍), 상대장군 (上大將軍)
지방관여릉태수 (廬陵太守), 교주자사 (交州刺史)
생애
초기 경력손권 휘하에서 종사 (從事)
교주 평정교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섭의 잔당을 토벌하고 교주를 안정시킴
주요 전투조위와의 여러 전투 참여
산월 토벌
최종 직위손량 시대에 대사마 (大司馬)까지 오름
가족 관계
자녀여개
섬긴 군주
군주손권, 손량

2. 생애

군과 현의 관리를 지냈으나, 중원 전란을 피해 강동(오)으로 피난하여 손권 시대에 그 막부에 등용되어 오현의 승이 되었다. 손권은 여러 현의 장과 승을 불러 지방 행정에 대해 질문하곤 했는데, 그때 여대의 답변을 보고는 마음에 드는 인재라고 생각하여 막부로 불러들여 녹사로 삼았다.

이후 다시 지방으로 나가 여요현의 장이 되자, 정예병을 모집하여 1천 명의 병사를 모아 부하로 삼았다.[4] 회계군의 등 5개 현의 불복종 백성들이 여합과 진랑을 수령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여대는 손권에게서 독군교위로 임명되어 장군 장흠과 협력하여 이를 진압했다. 이 공적으로 소신중랑장에 임명되었다.

건안 16년 (211년), 손권은 여대에게 부장 윤이 등 병사 2천 명을 이끌고 한중군장로광한군의 검성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장로는 경계하여 길을 막았으므로 실패하여 손권의 명령에 따라 귀환했다.[54] 이 돌아오는 길에, 촉 침공 도중의 유비군과 백제 부근에서 만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55]

건안 20년 (215년), 유비와의 사이에서 형주를 둘러싼 일촉즉발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여몽손무 등과 함께 장사 삼군[56]을 항복시켰다. 안성··영신·다릉의 관리들이 반역했으므로, 그들이 농성하는 음산성을 포위하여 순식간에 함락시켰다. 그 후, 여몽은 삼군에 손하[57]를 두어 진수를 맡기고, 관우노숙이 대치하는 익양으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결국, 양군은 교전하지 않고 대치를 계속했다.[58] 앞서 조조가 장로를 꺾고 한중을 손에 넣은 탓에, 유비가 근거로 삼는 익주가 조조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어, 유비는 익주를 잃을까 두려워 손권에게 화해를 요청했다. 유비는 이에 상수를 경계선으로 나누고, 장사·계양의 영유권을 손권에게 인정하여 형식적으로 휴전했다. 손권은 장사·계양 두 군이 오의 영유권에 귀속되자 장사에 여대를 머물게 하고 복양일의 휘하에 두었다.[59]

건안 22년 (216년)[60], 장사군 안성현령 오탕과 중랑장 원룡이 관우에게 호응하여 기회를 틈타 다시 반란을 일으켜, 유와 례릉에 근거했다. 손권은 횡강장군 노숙에게 명령하여 유를 공격하게 하고, 여대에게는 례릉을 공격하게 했다. 노숙은 오탕을 격파하자, 여대는 례릉을 함락시키고 원룡을 참수했다. 장사의 난을 평정하고, 이 공적으로 로릉태수로 전임되었다.

연강 원년 (220년), 보즐의 대를 이어 교주자사가 되었다. 고량의 불복종 주민 수령 전박이 항복해오자, 손권에게 상주하여 그를 고량 서부도위로 삼았다. 울림의 이민족 불복종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군과 현의 관청을 공격해오자, 여대는 이를 격파했다. 계양과 정양 일대를 세력으로 삼고 있던 도적 왕금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남해군의 변방 지역에서 사람을 모아 주변을 약탈하고 있었다. 여대는 손권에게서 토벌 명령을 받고 왕금을 공격하여, 왕금을 포로로 잡아 도읍으로 보내고, 1만 명 정도의 반란군을 참하거나 포로로 삼았다. 안남장군이 되고, 가절을 하사받았으며, 도향후에 봉해졌다.

황무 5년 (226년), 교지 태수 사섭이 죽자, 손권은 사섭의 아들 사휘를 안원장군에 임명하고 구진태수로 삼았으며, 교지태수는 교위 진시를 임명하려 했다. 여대는 손권의 허가를 받아, 교주를 해남 3군[61]과 해동 4군[62]으로 분할하여, 전자를 교주, 후자를 광주로 하고, 교주의 자사는 장군 대량을 임명하고, 자신은 광주의 자사가 되었다. 그러나 대량과 진시의 부임에 반발한 사휘가 이를 방해하자, 여대는 사휘의 죄를 묻고자, 3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수군으로 교지에 야습했다. 어떤 이는 사씨 일족의 실력을 두려워하여 군사를 천천히 진격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여대는 사휘 등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포에서 대량과 합류하여, 그대로 급히 군대를 진격시켰다. 더욱이 여대는, 사휘를 돕지 않은 사광 (사휘의 사촌)과 안면이 있었기에, 사광에게 사휘 등의 관직은 박탈하되 생명은 보장하겠다고 전하고, 그 설득을 명했다. 사휘는 크게 두려워하여 형제 6명과 함께 항복해왔다. 그러나 여대는 사전 약속을 어기고, 사휘 형제들을 모두 처형하고, 그 수급을 손권에게 보냈다. 그 후, 사씨 잔당의 감례와 환치 등의 저항을 물리치고, 교주를 평정했다. 번우후에 봉해졌다. 광주는 폐지되고, 다시 교주가 되었다.

그 후에도 여대는 남쪽의 구진을 토벌하여, 수만 명을 쳐 죽이거나 포로로 삼았다. 더욱이 남쪽의 나라에 관리를 보내, 오의 선전을 펼쳤다. 이로 인해, 멀리 떨어진 부남, 림읍, 당명의 왕들까지 사자를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러한 공적으로 여대는 진남장군에 임명되었다.

황룡 3년 (231년), 교주에서 장사로 임지를 옮겨졌다. 무릉의 이민족이 불안정한 움직임을 보이자, 태상 반준 등과 함께 무릉의 이민족을 토벌하고, 평정했다.

가화 3년 (234년), 반장이 사망하자, 여대가 그의 병사를 이어받아 육구의 수비를 맡게 되었다. 여대는 주둔지를 포기로 이전했다.

가화 4년 (235년), 로릉의 도적 이환·로합, 회계군 동야의 도적 수춘, 남해의 도적 나려 등의 반란이 발발하자, 손권은 여대에게 그 진압을 명령했고, 여대는 즉시 유찬과 당자 등을 이끌고 군대를 진격시켜, 수령들을 참수하거나 투항시켜, 반란을 진압했다. 손권은 여대를 칭찬하며, 자유로운 재량으로 상벌을 행해도 좋다고 허가했다.

적오 2년 (239년), 반준이 사망하자, 여대가 형주의 공문 결재를 담당하게 되었고, 육손과 함께 무창의 수비를 맡게 되었다. 포기의 주둔군 지휘는 계속 맡았다.

같은 해 10월[63], 도독 요식이 림하 태수 엄강 등을 살해하고, 영릉·창오·울림에서 수만 명 규모의 반란을 일으켜 상황이 불안해지자, 여대는 상주하는 동시에 군세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다. 손권은 교주목의 직을 더하여 주고, 뒤이어 장군과 병사를 여대에게 차례로 파견했다. 1년 만에 반란을 진압하고, 요식과 요잠과 비양 등 반란자들을 참수하고, 무창으로 귀환했다.

적오 8년 (245년), 육손이 죽고, 제갈각이 육손의 직무를 이어받게 되었지만, 손권은 무창의 군권을 둘로 나누어, 여대를 우부의 총감으로 삼고, 무창에서 포기까지의 지휘를 맡겼다. 여대는 상대장군이 되었고, 아들 여개도 부군교위가 되어 포기에 병사 감독에 종사했다.

태원 원년 (251년), 손권이 위독해지자, 제갈각 등과 함께 후사를 부탁받았다. 여대는 이 무렵에는 "여후"라고 불리며 오의 원로였다. 같은 직책의 제갈각에게 경고하며, "지금이야말로 다난한 시대다. 어떤 일이든 10번 생각하고 하시오."라고 가르쳤지만, 강골인 제갈각은 "논어에서도 두 번 생각하면 충분하다고 말하는데, 10번이라니, 저를 바보 취급하는 겁니까!"라고 되받아쳤다. 과연 여대도 이 발언에는 놀라 침묵했다. 세상 사람들은 처음에는 제갈각의 당의즉묘를 칭찬하고, 여대의 실언을 헐뜯었지만, 그 이듬해에 제갈각이 임무에 실패하여 암살되자, 암살의 조짐이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64] 손량이 황제가 되자 여대는 대사마에 임명되었다.

태평 원년 9월 기축 (256년 10월 21일), 사망했다. 향년 96세. 장례는 검소하게 치르도록 유언했다.

2. 1. 후한 말 시절

후한 말기, 여대는 현리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손권(孫權)의 막하에서 독군교위와 소신중랑장을 역임했다.[4] 중원 전란을 피해 강동(오)으로 피난한 후, 손권에게 등용되어 오현의 승이 되었다.[4] 손권은 여대의 답변을 보고 뛰어난 인재로 여겨 막부로 불러들여 녹사로 삼았다.

이후 여대는 여요현의 장으로 나가 정예병 1천 명을 모아 부하로 삼았다.[4] 회계군의 등 5개 현에서 여합과 진랑을 수령으로 반란이 일어나자, 독군교위로 임명되어 장군 장흠과 협력하여 진압하고 소신중랑장에 임명되었다.

건안 16년(211년), 한중군장로광한군의 검성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귀환하던 중 유비군과 만나기도 했다.[54][55]

건안 20년(215년), 형주를 둘러싼 분쟁에서 여몽 등과 함께 장사 삼군[56]을 항복시켰다. 안성··영신·다릉 관리들의 반역을 진압하고, 익양에서 관우노숙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상수를 경계로 휴전이 성립되자 장사에 머물렀다.[59]

건안 22년(216년)[60], 장사군 안성현령 오탕과 중랑장 원룡관우에게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횡강장군 노숙과 함께 진압하고 로릉태수로 전임되었다.[60]

연강 원년(220년), 보즐의 뒤를 이어 교주자사가 되었다.

2. 2. 회계군 반란 진압

손권은 여대를 교위로 임명하고 장흠을 도와 회계군 동쪽 다섯 현(현재의 사오싱, 저장 성 일대)에서 일어난 여합(呂合zh-hant)과 진랑(秦狼중국어)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6] 여대와 장흠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다섯 현을 평정하고 두 반란 지도자를 생포했다. 여대는 그 공로로 소신중랑장(昭信中郎將중국어)으로 승진했다.[6]

회계군의 등 5개 현의 불복종 백성들이 여합과 진랑을 수령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여대는 손권에게서 독군교위로 임명되어 장군 장흠과 협력하여 이를 진압했다.[6]

2. 3. 한중 원정 (실패)

211년, 여대는 부장 윤이와 함께 병사 2,000명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 한중을 근거지로 둔 군벌 장로를 함흥군(현재의 바오지시, 산시성 일대)으로 유인하려 했다. 그러나 장로는 수상히 여겨 응하지 않았다. 손권은 이에 여대와 그의 부하들에게 강동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7]

돌아오는 길에 여대는 백제성(현재의 충칭시, 펑제현)을 지나 손권의 동맹 유비를 만났는데, 유비는 익주 (현재의 쓰촨성과 충칭)의 자사 유장으로부터 익주를 빼앗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는 유비의 군대가 혼란에 빠져 병력의 절반이 도주하거나 죽었다는 것을 보고 유비가 익주를 정복하는 데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강동으로 돌아온 후 그는 손권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손권은 그의 참모 오범에게 물었다. 오범은 이전에 유비가 익주를 정복할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오범은 "나의 예측은 하늘의 뜻에 근거한 것입니다. 여대가 본 것은 사람의 행동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오범의 예측은 적중하여 유비는 결국 214년에 익주를 정복했다.[8]

건안 16년 (211년), 손권은 여대에게 부장 윤이 등 병사 2천 명을 이끌고 한중군장로광한군의 검성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장로는 경계하여 길을 막았으므로 실패하여 손권의 명령에 따라 귀환했다.[54] 이 돌아오는 길에, 촉 침공 도중의 유비군과 백제 부근에서 만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55]

2. 4. 손-유 영토 분쟁

215년, 손권이 동맹 유비형주 (현재의 후베이성후난성에 해당)에서 영토 분쟁을 벌였을 때, 여대는 손모(孫茂)와 다른 9명의 장교를 부관으로 임명받아 군대를 이끌고 장사, 영릉군 (零陵; 현재의 후난성 융저우 주변) 및 계양군 (桂陽; 현재의 후난성 천저우 주변)의 세 군을 장악했다.[9] 안성현, 유현, 용신현, 차령현의 네 현 관리들은 음산현 (陰山縣; 현재의 후난성 헝둥현 남동쪽)으로 이동하여 여대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여대는 군대를 이끌고 음산현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10]

손권은 여대에게 장사를 맡겼다.[12] 그 무렵 안성현의 현령이었던 오당(吳碭)은 군관 원룡(袁龍)과 공모하여 손권에게 반역하고 형주 남부에서 유비의 영토를 지키는 장군인 관우에게 귀순하려 했다.[11] 오당은 유현을 점령했고, 원룡은 영릉현에 주둔했다.[11] 손권은 장군 노숙을 보내 오당을 공격하게 했고, 노숙은 오당을 격파하고 현들을 탈환했다.[12] 여대는 영릉현을 공격하여 원룡을 사로잡아 처형했다.[12]

결국, 양군은 교전하지 않고 대치를 계속했으며,[58] 조조가 장로를 꺾고 한중을 손에 넣은 탓에, 유비는 익주를 잃을까 두려워 손권에게 화해를 요청했다. 유비는 상수를 경계선으로 나누고, 장사·계양의 영유권을 손권에게 인정하여 형식적으로 휴전했다. 손권은 장사·계양 두 군이 오의 영유권에 귀속되자 장사에 여대를 머물게 하고 복양일의 휘하에 두었다.[59]

216년,[60] 장사군 안성현령 오탕과 중랑장 원룡이 관우에게 호응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켜, 유와 례릉에 근거했다. 손권은 횡강장군 노숙에게 명령하여 유를 공격하게 하고, 여대에게는 례릉을 공격하게 했다. 노숙은 오탕을 격파했고, 여대는 례릉을 함락시키고 원룡을 참수했다. 장사의 난을 평정하고, 이 공적으로 로릉태수로 전임되었다.

2. 5. 교주 자사 부임

여대는 손권(孫權)의 막하에서 독군교위와 소신중랑장을 지냈으며, 후한 말년에 교주자사로 있었다.[13][14][15] 215년, 여몽과 함께 장사, 영릉, 계양 등을 공략하였다. 220년에는 보즐의 뒤를 이어 교주 자사로 임명되었다.[13][14][15]

여대가 교주 자사로 취임한 후, 고량군의 도적 두목 전박이 항복해 오자 그를 고량군 서부의 도위로 임명했다.[13] 또한 울림군의 토착 부족들의 봉기를 진압했다.[14]

그 무렵, 진양현의 도적 두목 왕금이 남해군 변경을 약탈하자, 여대는 군대를 이끌고 도적들을 공격하여 왕금을 생포하고 건업으로 보냈다. 이 작전으로 1만 명의 도적을 죽이거나 생포하였으며, 손권은 여대를 안남장군으로 승진시키고 도향후에 봉했다.[15]

2. 6. 사휘의 반란 진압

여대는 226년 교지군의 태수 사섭이 사망한 후, 사섭의 아들 사인(士徽)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6][17][18] 손권의 승인을 받아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사인을 공격했다.[19] 여대는 사인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나타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 판단하여 즉시 공격을 시작하면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21]

여대는 군대를 이끌고 합포현에 집결하여 대량과 연합하여 사인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22] 여대가 군대를 이끌고 교지군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된 사인은 크게 당황하여 항복했고, 여대는 사씨 형제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머리를 손권에게 보냈다.[23] 사인 휘하에서 복무했던 감례(甘醴)와 환치(桓治)가 복수를 위해 공격해 왔으나, 여대는 그들을 물리치고 남은 반대 세력을 제거했다.[24] 이러한 공으로 여대는 번우후(番禺侯)라는 작위를 받았다.[24]

사인 휘의 반란 이후 손권은 광주를 폐지하고 교주를 복원했다.[25] 여대는 군대를 이끌고 구진군으로 진격하여 수만 명의 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한족 문화를 전파하고 비한족들을 한화하는 정책을 펼쳤다.[25] 또한 푸난, 림읍, 동남아시아 본토의 당명(堂明)과 같은 외국 왕국의 통치자들에게 사신을 보내 오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했다.[26] 손권은 여대를 진남장군(鎮南將軍)으로 승진시켰다.[26]

황룡 3년(231년)에는 무릉의 소수민족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2. 7. 남방 평정과 교화

여대는 오나라의 남방 평정과 교화에 힘쓴 인물이다. 황룡 3년(231년), 무릉의 소수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여대는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를 진압했다.[28][29] 이때 반준은 여대가 반란군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그를 감독하고 지원했다.[28][29] 234년까지 1만 명이 넘는 반란군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토착 부족들은 크게 약화되었다.[28][29]

235년에는 노릉, 동 회계군, 남해에서 거의 동시에 반란이 일어났다. 여대는 유찬과 당자를 부관으로 삼아 각각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반란을 진압한 후, 손권은 여대가 세 군에서 평화를 회복한 공적을 칭찬하는 조서를 내렸다.[33]

반준이 239년에 사망한 후,[34] 여대는 그의 뒤를 이어 형주의 모든 민사 및 문서 관련 업무를 감독했다. 그는 또한 육손과 함께 무창 (현재의 악주)으로 옮겼지만, 포기 (현재의 적벽)의 주둔지를 계속 관리했다.[34]

239년 10월, 도독 요식이 림하 태수 엄강 등을 살해하고, 영릉·창오·울림에서 수만 명 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63] 여대는 상주하는 동시에 군세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며, 1년 만에 반란을 진압하고, 요식과 요잠과 비양 등 반란자들을 참수하고, 무창으로 귀환했다.[63]

적오 8년(245년), 육손이 죽자 무창의 군권을 둘로 나누어, 여대를 우부의 총감으로 삼고, 무창에서 포기까지의 지휘를 맡겼다. 여대는 상대장군이 되었고, 아들 여개도 부군교위가 되어 포기에 병사 감독에 종사했다.[64]

태원 원년(251년), 손권이 위독해지자, 제갈각 등과 함께 후사를 부탁받았다. 여대는 이 무렵에는 "여후"라고 불리며 오의 원로였다.[64] 손량이 황제가 되자 여대는 대사마에 임명되었다.

태평 원년 9월 기축 (256년 10월 21일),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4]

2. 8. 무릉, 여릉, 회계, 남해 반란 진압

황룡(黃龍) 3년(231년) 무릉의 소수민족들의 반란을 진압했다.[28][29] 당시 무릉군 오계 (五谿; 현재의 회화 후난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토착 부족들이 오나라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키자, 손권은 여대에게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234년 12월까지 1만 명이 넘는 반란군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면서 반란은 종식되었고, 토착 부족들은 크게 약화되었다.[28][29]

235년에는 노릉 (廬陵; 현재의 길안 강서 주변), 동 회계군 (會稽郡; 현재의 소흥 절강 주변) 및 남해 (南海; 현재의 광저우 광둥 주변)의 세 군에서 거의 동시에 반란이 일어났다.[31] 이환 (李桓)과 노합 (路合)은 노릉에서, 수춘 (隨春)은 동 회계에서, 나려 (羅厲)는 남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31] 손권은 여대에게 유찬 (劉纂)과 당자를 부관으로 삼아 각각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도록 명령했다. 여대는 반란군을 격파하고, 반란 지도자들을 처형한 후 그들의 머리를 손권에게 보냈다.[32] 손권은 여대가 반란을 진압하고 세 군에서 평화를 회복한 공적을 칭찬하는 조서를 내렸다.[33]

2. 9. 형주 통치와 무창 분할

여대는 245년육손이 죽은 후 상대장군이 되었으며, 252년에는 대사마가 되었다.[40][42] 256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7]

240년경, 여대는 80세에 가까웠지만 여전히 건강했고, 무창의 모든 일상 업무를 직접 처리했다.[37] 장승은 여대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충성심, 근면함, 헌신, 겸손함 등을 칭찬하며, 역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그의 덕을 높이 평가했다.[38]

243년, 여대는 주응과 강태를 동남아시아 대륙 남쪽 지역에 파견하여 중국 문화를 전파하도록 했다.[39] 강태는 ''오시외국전''을 저술하여 동남아시아 대륙을 여행하면서 본 것을 기록했다.[39]

육손이 245년에 사망한 후, 제갈각이 무창을 지키는 군사 지휘관이 되었고, 형주의 업무를 감독했다.[40] 손권은 무창을 두 구역으로 나누고, 여대에게 우익을 맡겨 포기에서 무창에 이르는 지역을 감독하게 했다.[40] 246년 9월 또는 10월, 여대를 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아들 여개를 교위로 임명하여 포기의 군사 주둔지를 감독하게 했다.[41][42]

2. 10. 요식의 반란 진압

황룡 3년(231년), 무릉의 소수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태상 반준 등과 함께 이들을 토벌하고 평정했다.

같은 해 10월, 도독 요식이 림하 태수 엄강 등을 살해하고, 영릉, 창오, 울림에서 수만 명 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여대는 상주하는 동시에 군세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며, 손권은 여대에게 교주목 직을 더하고 장군과 병사를 차례로 파견하여 지원했다. 1년 만에 반란을 진압하고, 요식, 요잠, 비양 등 반란 주동자들을 처형한 후 무창으로 귀환했다.

2. 11. 말년과 죽음

여대는 231년, 무릉 소수민족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245년 육손이 죽은 후 상대장군이 되었으며, 252년에는 대사마가 되었다.[43][44]

256년 10월 21일, 96세(동아시아식 나이)의 나이로 병사했다. 손권(孫權)이 252년 5월에 사망한 후, 그의 막내아들 손량(孫亮)이 오(吳)나라의 다음 황제가 되었고,[43] 그해 5월 또는 6월, 손량은 여대를 대사마(大司馬)로 임명했다.[44]

여대는 죽기 전에, 장식 없는 관에 묻히고, 수수한 옷을 입고, 간소한 장례를 치르라는 지시를 남겼다. 그의 아들 여개(呂凱)는 번우후(番禺侯)로서 그의 작위를 상속받았으며, [45] 아버지의 모든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46]

3. 일화

여대는 80세가 넘어서도 검소한 생활을 하며 업무에 매진했기에, 분위장군 장승은 편지를 보내 여대를 칭찬했다.[47]

그러나 여전히 검소함을 유지하며 업무에 열심이었기에, 교주에 부임했을 때는 가족에게 수년간 생활비를 보내지 않아 가족들은 곤궁에 처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손권은 여대가 아닌 신하들을 책망하며, 돈과 쌀, 그리고 옷감을 해마다 여대의 가족에게 보냈다고 한다.[48][49]

친구인 서원은 직언을 하는 성격이었으나, 여대는 이를 기뻐하며 그의 영달을 위해 여러 편의를 제공했고, 그가 죽자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우정은 미담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50][51][52]

3. 1. 청렴과 검소

여대는 정직하고 검소하며 단순한 삶을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47] 교주에서 관직을 수행하는 동안 수년 동안 집에 수입을 보내지 않아 가족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게 했다.[47]

손권은 이 소식을 듣고 한탄하며 신하들에게 "여대는 수천 리 떨어진 곳에서 충실히 국가에 헌신하고 있는데, 그의 가족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나는 지금까지 그것을 몰랐다. 너희, 나의 측근들과 정보 수집가들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고 말했다.[48] 그는 그 후 여대의 가족에게 매년 일정량의 돈, 곡식, 천과 비단을 보내도록 조치했다.[49]

여대는 80세가 넘어서도 검소한 생활을 하며 업무에 매진했고, 분위장군 장승은 편지를 보내 여대를 칭찬했다.

친구인 서원은 직언을 하는 성격이었으나, 여대는 이를 기뻐하며 그의 영달을 위해 여러 편의를 제공했고, 그가 죽자 몹시 슬퍼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미담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3. 2. 서원과의 우정

오군 출신으로 관대하고 야심만만한 서원(쉬위안/徐原중국어)과 절친한 사이였다. 여대는 서원의 큰 잠재력을 보고 그에게 자주 옷을 보내고, 시사 문제를 자주 논하며, 고위직을 추천했다. 서원은 결국 오나라 정부에서 감찰어사의 자리까지 올랐다.[50]

서원은 충성스럽고, 대담하며, 직언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대가 실수를 하면, 서원은 사적으로 지적하고, 동시에 그 문제를 공론화하여 토론했다. 누군가가 여대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여대는 "이것이 내가 덕원(서원의 )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라고 말했다.[51]

서원이 죽자, 여대는 몹시 슬퍼하며 울었고, "덕원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누가 나의 잘못을 지적해 줄 것인가?"라고 말했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들의 우정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52]

4. 평가

여대는 80세가 넘어서도 검소한 생활을 하며 업무에 매진하여 장승의 칭찬을 받았다. 교주(交州)에 부임했을 때는 가족에게 수년간 생활비를 보내지 않아 가족들이 곤궁에 처하기도 했으나, 손권은 오히려 신하들을 책망하며 여대의 가족에게 돈과 쌀, 옷감을 해마다 보냈다.

여대는 친구 서원의 직언을 기뻐하며 그의 영달을 위해 여러 편의를 제공했고, 서원이 죽자 몹시 슬퍼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미담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4. 1. 현대적 관점

여대는 80세가 넘어서도 검소한 생활을 하며 업무에 매진하여 장승의 칭찬을 받았다. 교주(交州)에 부임했을 때는 가족에게 수년간 생활비를 보내지 않아 가족들이 곤궁에 처하기도 했으나, 손권은 오히려 신하들을 책망하며 여대의 가족에게 돈과 쌀, 옷감을 해마다 보냈다.

여대는 친구 서원의 직언을 기뻐하며 그의 영달을 위해 여러 편의를 제공했고, 서원이 죽자 몹시 슬퍼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미담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5.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는 손권의 임종 시 려대가 제갈각과 함께 평상 밑으로 불려가 손권으로부터 후사를 부탁받는 장면에 이름이 언급될 뿐이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8
[2] 웹사이트 Longest-living people of the Three Kingdoms ranked; at the top was a man who lived until the age of 105 https://www.gigcasa.[...] 2018-05-06
[3] 서적 Sanguozhi vol. 60
[4] 서적 Sanguozhi vol. 60
[5] 서적 Sanguozhi vol. 60
[6] 서적 Sanguozhi vol. 60
[7]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60
[8] 서적 Sanguozhi vol. 63
[9] 서적 Sanguozhi vol. 60
[10] 서적 Sanguozhi vol. 60
[11] 서적 Sanguozhi vol. 60
[12] 서적 Sanguozhi vol. 60
[13] 서적 Sanguozhi vol. 60
[14] 서적 Sanguozhi vol. 60
[15] 서적 Sanguozhi vol. 60
[16] 서적 Sanguozhi vol. 60
[17] 서적 Sanguozhi vol. 60
[18] 서적 Sanguozhi vol. 60
[19] 서적 Sanguozhi vol. 60
[20] 서적 Sanguozhi vol. 60
[21] 서적 Sanguozhi vol. 60
[22] 서적 Sanguozhi vol. 60
[23] 서적 Sanguozhi vol. 60
[24] 서적 Sanguozhi vol. 60
[25] 서적 Sanguozhi vol. 60
[26] 서적 Sanguozhi vol. 60
[27] 서적 Sanguozhi vol. 60
[28] 서적 Sanguozhi vol. 61
[29] 서적 Sanguozhi vol. 60
[30] 서적 Sanguozhi vol. 60
[31] 서적 Sanguozhi vol. 60
[32] 서적 Sanguozhi vol. 60
[33] 서적 Sanguozhi vol. 60
[34] 서적 Sanguozhi vol. 60
[35] 서적 Sanguozhi vol. 60
[36] 서적 Sanguozhi vol. 60
[37] 서적 Sanguozhi vol. 60
[38] 서적 Sanguozhi vol. 60
[39] 문서 The book, while extant during the Tang to Song dynasties, was later lost and only excerpts have survived.
[40] 서적 Sanguozhi vol. 60
[41] 서적 Sanguozhi vol. 47
[42] 서적 Sanguozhi vol. 60
[43] 서적 Sanguozhi vol. 60
[44] 서적 Sanguozhi vol. 48
[45] 서적 Sanguozhi vol. 60
[46] 서적 Sanguozhi vol. 60
[47] 서적 Sanguozhi vol. 60
[48] 서적 Sanguozhi vol. 60
[49] 서적 Sanguozhi vol. 60
[50] 서적 Sanguozhi vol. 60
[51] 서적 Sanguozhi vol. 60
[52] 서적 Sanguozhi vol. 60
[53] 서적 三国志
[54] 서적 呉書
[55] 서적 三国志
[56] 문서 長沙郡・桂陽郡・零陵郡
[57] 문서 孫皎と思われる。
[58] 서적 三国志
[59] 서적 岳陽風土記
[60] 서적 走馬長沙呉簡
[61] 문서 交阯郡・九真郡・日南郡
[62] 문서 南海郡・蒼梧郡・鬱林郡・合浦郡
[63] 서적 三国志
[64] 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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